키세가 락커룸에 들어서자 앉아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집중하는 카사마츠가 보였다. 별로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발견한 이상 물어보는 것이 인지상정, 그렇게 생각하고 물어봤는데 의외로 성실한 대답이 나왔다. 키세는 락커룸에서 어울리지 않게 꼼질꼼질 무언가에 열중하는 카사마츠가 신기했다. 집중하는 카사마츠는 여러 번 보았지만 손재주가 필요해 보이는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가까이 다가가자 카사마츠의 손가락과 비교해서도 작은 매니큐어를 들고 손톱에 어떻게든 바르려고 애쓰는 광경이 보였다. 손톱깎이와 줄 정도로 관리하고 말 줄 알았는데 이 사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어서 아는 척을 했더니 진지하고 무서운 반응이 돌아왔다. 더 말을 걸면 매니큐어를 든 채로 때릴 것 같아 입을 다물고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평소에도 이 사람이 이런 걸 발랐던가?'
손톱깎이와 줄 정도라면 평소에 자신도 사용하던 것이고 라커룸에도 감독이 비치해 놔서 종종 쓰이는 모습을 봐왔지만 매니큐어는 촬영장에서 외에는 누가 바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늘 봐왔던 그 손은 매니큐어의 광택은 돌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니큐어를 잡고 있는 손의 네 번째 손톱에 눈이 갔다. 단정하고 둥글던 손톱의 끝이 조금 깨져있었다.
"선배 혹시 요즘 컨디션 관리 안하는 검까? 손톱 깨졌잖슴까." "너 조용히 좀... 뭐?"
카사마츠는 의외로 말을 듣고서 화내던 것인지 키세가 묻는 내용에 당황해서 자기 말도 끊어버리고 되물었다. 키세도 굳이 지적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카사마츠가 혼자 매니큐어를 바르는 게 하도 답답해서 물어본 것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 들어왔다. 카사마츠는 실수를 들킨 어린 아이처럼 표정관리도 못하고 손에 든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도 멈추고는 키세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키세의 입에서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 지 대비라도 하는 건지. 키세는 '주장, 여기까지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리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뭐, 됐으니까 손 좀 보여주십쇼."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일단 카사마츠의 손에서 매니큐어를 뺏어서 곱게 뚜껑을 닫아두었다. 한 대 쯤 맞을 줄 알았는데 카사마츠는 양심이 찔려서 그런 것인지 화를 누르고 있어주는 모양이었다. 그것에 감사하며 키세는 그 손을 잡아당겨 살펴보았다.
"왼쪽 넷째 손가락 손톱, 깨진 거 다 보임다. 그리고 대체 왜 왼손으로 오른쪽 손톱을 바르려고 한 검까? 어디 봐요." "그야! 혼자 바르니까..."
깨진 손톱은 왼쪽 넷째 외에도 있었다. 오른쪽 검지와 새끼손가락 손톱. 왼쪽 넷째와 오른쪽 새끼손가락의 상태는 끝이 조금 갈라지고 떨어져나간 정도였지만 오른쪽 검지손톱의 상태는 조금 심각했다. 얇게 벗겨지고 있는 모양. 어째서 매니큐어까지 바르려고 했는지 이해가 가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도 손톱 상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카사마츠는 뭘 하고 있던 것일까? 키세는 평소보다 조금 심각해졌다.
"선배 주장일이 많이 힘들어서 그런 검까? 컨디션이라면 누구보다 관리 잘 할 사람이 선배 아님까." "너, 답지않게 웬 걱정이냐." "그야! 선배 손이 이 지경인데 에이스로서 걱정이 안 되겠슴까? 주장이 안 받쳐주면 누가 저한테 공을 줍니까?"
짐짓 타박하는 말투에 저도 모르게 화가 났던 건지, 키세는 언성을 높여 말을 꺼내다 얼른 목소리 크기를 줄였다. 키세가 진지한 말투라서 놀란 건지 카사마츠의 눈이 동그래졌다. 손을 잡히고 부터 얼굴에 붉게 올랐던 기운도 그 탓인지 사라졌다. 키세는 한 숨을 한 번 쉬고(카사마츠 이마에 힘줄이 살짝 돋았다가 사라졌다) 매니큐어를 잡았다. 그 덕에 잠깐 손이 풀린 카사마츠는 제 손톱을 만져보며 혀를 한 번 찼다.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거면 말 안 해도 됨다. 하지만 컨디션 관리도 못 할 정도라면 그건 감독한테라도 말을 해야지 않슴까? 저는 카이조에 이기기 위해 왔다구요."
매정한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키세는 입을 쉬지 않았다. 물론 카사마츠의 손톱에 매니큐어도 정성스레 바르는 중이었다. 누나들에게 애교도 피울 겸, 여자친구들에게 잘 보일 겸 해서 하던 일을 주장에게 써먹을 줄은 키세도 몰랐다. 그리고 키세의 말은 의외로 카사마츠에게는 잘 먹힌 모양이었다.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제법 멋있어졌는데?"
생각도 못한 칭찬에 매니큐어를 바르는데 집중하던 머리를 들자 정말 드물게 보이는 표정이 보였다. 무려 키세의 앞인데도 카사마츠는 미간의 힘을 모두 풀고 눈꼬리를 매력적으로 휘며 웃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빠져 매니큐어 붓이 손톱옆으로 조금 벗어나버렸다.
"얌마, 칭찬 하자마자 실수하는 거냐?" "힉! 이 이건 선배가 상상도 못한 칭찬을 하니까... 으악! 잘못했슴다!" "잘 발라라. 너, 그리고 이건 감독님한테 들켜서 매니큐어 받은 거라고."
열심히 봉사하던 중에 다리를 발로 걷어차였지만 별로 억울한 기분은 아니었다. 감독은 알고 있었다는 것도 카사마츠의 입에서 들었으니까. 보통이라면 키세 너는 신경 끄라는 소리가 돌아왔을텐데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괜찮아졌다. 아니, 그것만으로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드물게, 그것도 멀리서나 목격하던 표정을 정면에서 봐 버렸으니 심장에 무리가 올 지경이었다. 카사마츠의 손을 잡고 이번에는 좀 더 신경써서 하겠다는 핑계로 키세는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고개를 숙여 간신히 감췄다. 하지만 주장은 농구 코트에서만 주변을 잘 파악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장에게 맞고는 있었지만 키세는 그의 열 손가락에 매니큐어를 착실히 발라나갔다. 이 와중에 투명한 색 말고 다른 색도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냈다가는 이 정도의 괜찮은 분위기도 깨버리고 단번에 험악해질 것을 짐작해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이거 다 마르면 밖으로 튀어나간 건 아세톤으로 살짝 지우면 됨다. 그것도 제가 해드릴테니까 가만히 계십셔." "오냐."
어쩐지 카사마츠도 고분고분하게 굴며 웃고 있었는데 그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키세는 참 궁금했다. 언젠간 주장 스스로 말해줄 정도로 가까워질 날을 바라며 카사마츠의 오른쪽 검지 손톱에 마지막으로 바르고 매니큐어의 뚜껑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