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오랜만의 전력입니다!


주제: 꽃


시작합니다!









----------------------------------------------------------------------------------------------------------------------

서둘러 설치한 에어컨이 무색하게도 지난 주 까지 사람을 쪄죽일 것 같던 더위가 물러갔다. 해는 여전히 길어지는 중이었고 다시 더워질테니 괜히 설치한 건 아니었지만 카사마츠는 속이 쓰렸다. 덕분에 받은 월급이 반토막이 났건만 돈 쓸 곳은 여전히 많았다.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게 벌써부터 보이는 것 같았다. 


카사마츠 유키오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릭'하는 깔끔한 전자음이 들리고 잠금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닫는 소리까지 들렸을텐데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신발장에는 분명 안에 있는 사람의 신발이 있는데. 카사마츠는 습관처럼 짧은 한숨을 내쉬고 집안에 들어섰다. 


거실에는 소파 위에 있어야 할 쿠션들이 떨어져있고 소파 위에는 쿠션 대신 베개와 이불이 뭉친 채 올라와 있었다. 카사마츠가 출근할 때 본 그대로였다. 키세의 방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마 게임중이거나 노래를 듣고 있겠지. 혀를 찬 카사마츠는 키세를 불렀다. 시간을 조금 두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키세."


카사마츠는 한 번 더, 이번에는 목소리를 키워서 불렀다. 헤드셋이라도 쓰고 있는 건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넥타이도 풀지 않은 채 가방을 든 채 키세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도 반응이 없겠지 싶어 바로 문 손잡이를 잡았다. 


"뭔데요?"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려 카사마츠는 방 안으로 딸려들어갔다. 키세는 헤드셋도 쓰고 있지 않았고 시끄럽던 소리도 멈춰있었다. 뭘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키세는 표정으로 카사마츠에게 벽을 하나 세우고 있었다. 얼굴 가득 짜증난다는 감정을 내세워 카사마츠가 도로 방 밖으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집에 왔다고."


카사마츠는 당황하지 않고 평온한 어조로 살짝 웃기까지 하며 말했다. 키세가 눈을 가늘게 찡그리며 무어라 하려다 도로 입을 닫았다. 알았다고 작게 중얼거린 키세는 곧 방문을 닫았다. 


'다녀왔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키세가 하려던 말은 분명 그것이겠지. 하지만 다녀왔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입을 다물었겠지. 카사마츠는 미소가 부자연스러워지기 전에 방문이 닫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침실로 들어서서 불을 켜고, 가방을 걸어두고, 옷장을 열어 전신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푸는 걸 시작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 둘 풀고 벨트를 풀어내며 카사마츠의 굳었던 표정도 풀어졌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이 되어 에어컨을 켰다. 베개가 두 개, 이불은 하나 있는 넓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이불에서도 베개에서도 벌써 섬유유연제 냄새만 난다. 희미하게나마 키세의 냄새를 찾던 카사마츠는 기분이 가라앉아 그만두어버렸다.


'선배 씻고 누워야죠!'

'침대 더러워지니까 씻고 와요!'

'안 씻으면 쫓아낼거라니까요?'


환청처럼 떠오르는 키세의 잔소리를 들으며 카사마츠는 욕실로 향했다. 아무리 카사마츠가 깨끗이 씻어도 키세는 오늘도 소파에서 잘 것이다. 하지만 안 씻으면 안 씻는대로 싫어할테니 구석구석 신경써서 닦았다.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카사마츠는 조용히 울었다. 


키세는 일주일 전부터 카사마츠와 같이 자지 않았다. 방은 각자 따로 있어도 잠은 꼭 침실에서 함께 잤는데 키세가 단단히 화가 난 것이다. 곧 키세 생일이라고 기념일을 챙기지 않은 게 문제일까, 아니면 보이지도 않는 곳에 키스마크 남기지 말라고 한 게 문제일까, 집에서 쉬고 있는 사람에게 집에 있으면서 일도 안 한다고 뭐라고 한 게 문제일까. 다 카사마츠가 잘못한 일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결정타를 찾고 있었다. 키세는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랑하는 사이라면 같이 자야한다고 했는데 그것까지 깨게 만들 정도로 화날 게 뭐가 있을까.


'다녀왔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한 건 카사마츠가 집에 돌아올 때마다 다녀왔다고 해봐야 금방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투덜댄 뒤부터였다. 키세는 그럼 하지 말라고 깔끔하게 정리해버렸고 그때도 잠은 같이 잤다. 그 후에 돌아온 천 몇백일 기념일을 그냥 넘겨버렸다. 키세도 딱히 준비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다음날 메일함을 보니 키세가 보낸 축하 메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키세가 카사마츠에게 벽을 세웠다. 이상하게 다가가기 어렵고 스킨십도 하지 않는다고 깨달았을 때는 작업할 게 많다는 핑계로 키세가 소파에서 자기 시작했다. 그게 화가 나서 잠시 거실에서 쉬고 있는 키세에게 한마디 비꼬았더니 잘 때 외에는 거실에 나오지도 않았다. 간식을 들고 찾아가거나 좀 쉬면서 하라고 해도 방 안에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그게 결정타라고 카사마츠는 생각했다. 키스마크 얘기는 좀 더 오래됐는데 그 탓인지 줄곧 스킨십이 그리 많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 흔들리는 기반 위에 스크래치가 더해져서 결국 판이 깨진 것이다.


카사마츠는 불안해졌다. 화나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화를 삭이는 게 키세의 스타일이라지만 이번엔 너무 오래갔다. 보통 중간에 한 번은 화를 내러 오는데 키세는 그러지 않았다. 방문을 열어주긴 해도 짜증으로 벽을 세우고 사과를 들으면 알았다고만 하는 키세는 카사마츠에게 너무 낯설었다. 짐작가는 건 다 말했지만 결정적인 게 그 안에 없었던 것이다.


'꽃이라도 들고와서 사과하던가.'


어제는 그 말을 듣고 꽃을 사와서 사과했다. 키세는 처음엔 놀란 눈치였지만 카사마츠의 사과를 듣고는 또 얼굴 가득 짜증을 드러내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꽃을 보고는 조금 놀라고 기대하는 표정이었는데 카사마츠의 말이 끝나자 '그게 답니까?'라고 했다. 그게 키워드였다.


꽃이라니. 카사마츠도 사실 짚이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것만은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키세쪽 인연으로 알게 된 타투이스트에게 꽃 타투를 받았다. 발목 아래쪽에 조그맣게, 양말을 신으면 보이지도 않는 위치였지만 그래서 키세에게 말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원형이 되는 꽃의 꽃말은 '애정과 그리움'을 뜻하는 꽃이라고 했다. 부적같은 의미였다. 서로 바쁜 와중에도 기억하겠다는 의미였다. 사실은 기념일 선물이라며 보여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키세가 문신같은 거 하는 사람을 이해 못하겠다고 하는 걸 하필이면 타투 완성을 하고나서 들었다. 그리고 기념일이 지나갔다. 타투 위에는 살색 밴드를 붙여놨고 키세는 그걸 눈치도 못챘는지 뭐냐고 묻는 일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아닐것이었다.


그러나 그거 말고는 카사마츠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사이에 타투이스트가 키세에게 말했던걸까? 한동안 타투이스트도 휴양을 간다고 해서 키세와 만날 일이 없었을텐데. 키세와는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카사마츠는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나서까지도 고민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은 채 불 꺼진 거실에 빛이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90분 분량)




"윽!"

"카사마츠 선배? 괜찮아요? 왜 거기있어요?"


키세가 자러 나왔다가 무기물처럼 졸고 있던 카사마츠의 다리를 밟았다. 놀란 키세가 그 동안의 벽을 깨고 카사마츠에게 먼저 다가왔다. 불을 켜고 어디 좀 보자며 카사마츠를 만졌다. 그 동안 아무 접촉도 없었던 것이 서러웠는지 카사마츠는 왈칵 터져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키세는 많이 아프냐며 당황해서는 카사마츠의 다리를 살폈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카사마츠는 키세가 다리 여기저기를 짚을 때마다 도리질을 쳤다. 그러다 제 손으로 발목 아래에 붙은 밴드를 떼어내고는 끊임없이 사과했다.


"미안해, 미안해, 말하려고 했는데... 싫어하는 거 알고 한 건 아니야, 몰랐어, 미안해, 잘못했어..."


카사마츠는 눈물로 앞이 흐려져 키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제 울음 소리 때문에 키세가 뭐라고 하려는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키세가 제 다리를 잡은 손을 두 손으로 꼭 붙들고 그러니 가지 말라며, 사랑한다며 엉엉 울었다. 카사마츠가 겨우 진정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할 때까지 키세는 가지 않고 침착하게 카사마츠를 기다려줬다. 카사마츠는 그런 태도에서 희망을 보고 싫어하면 다시 지우겠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이 번만 용서해줘. 다시는 안 그럴게."

"하... 하하, 그런 거였어요?"


키세는 허탈하게 웃었다. 카사마츠의 발목에 있는 타투를 노려보다가도 헛웃음을 흘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카사마츠는 이게 문제가 맞았구나 싶으면서도 또 다른 오해가 있는 걸까봐 안심할 수 없었다.


"오해...였던거지? 나한테 더 화났어?"


카사마츠는 제 다리를 놓고 손에서 빠져나가는 키세의 팔을 보며 암담한 심정이 될 뻔 했다. 다행히 키세는 한숨을 푹 내쉬고 카사마츠를 끌어안았다.


"화는 났는데, 나한테 났어요. 나도 진작 물어볼 걸."

"머, 먼저 말 안해서 미안해. 키세 너한테 미움받기 싫어서 그랬어. 미안해."

"나도 미안해요. 선배가 그 문신가랑 바람 피우는 줄 알았거든요."


카사마츠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작은 타투지만 만나서 상의하고 결정하느라 여러 번 본 것이 문제였던걸까? 하지만 키세는 그걸 또 어떻게 안 거지? 카사마츠는 발 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키세,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이것도 그래서... 진짜로 이것만 새겼어, 바람 같은 거 아니야아..."

"알아요, 선배 탓 아니야. 나도 사랑해요."


키세는 저를 붙들고 다시 눈물을 쏟아내는 카사마츠를 마주 안고 등을 토닥였다. 카사마츠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 동안의 외로움과 걱정, 불안이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카사마츠는 한 시간여를 더 울다가 키세에게 이끌려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키세는 잠든 카사마츠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는 도로 침실을 나갔다. 하지만 소파에서 잘 생각은 아니었다. 그 동안 카사마츠에게 열어주지 않았던 제 방으로 들어간 키세는 모니터에 띄워둔 영상을 한 번 더 재생했다. 


카페인지 사람들 말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가운데 카사마츠가 그 타투이스트에게 노란 꽃을 하나 건네는 영상이었다. 타투이스트는 꽃을 받아들고 무어라 카사마츠에게 속삭였고 카사마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가까이에서 찍었는지 선명한 영상이었다. 둘은 주변이 시끄러운 탓인지 대부분 필담을 나누었고 그게 아니면 귀에 대고 말하는 걸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게 다 타투를 하려는 상담이었다니.'


키세는 스킨십을 피하는 카사마츠에게 몰래 미행을 붙였다. 그리고 누군가와 만나면 영상을 찍어달라고 했고 그래서 직접 찍은 영상이 아닌 탓에 카사마츠를 오해했던 것이었다. 문신 얘길 꺼낸 것도 카사마츠를 떠보려는 수작이었는데 카사마츠가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더욱 얘기를 하지 않게 되어 오해가 커졌다. 키세는 괜히 영상 탓으로 돌리며 영상을 휴지통에 집어넣고 하던 작업을 조금 더 진척시켰다. 그 영상 탓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어거지로 붙들었던 작업이지만 다행히 막바지였다. 조금만 더 하고 카사마츠 옆에 붙어 잘 생각을 했다.


아무리 발목만이라고 해도, 역시 다른 사람 손이 탔다는 건 그리 기분좋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동안 사과받았던 대로 다녀왔다는 소리도 꼬박꼬박 시키고, 키스마크도 잔뜩 여기저기 만들어두고, 틈만 나면 카사마츠를 끌어안고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타투가 닳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그 꽃잎이 닳도록 카사마츠의 발목을 매만져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닳지 않더라도 그 꽃잎만 보면 키세 자신이 떠오르도록 말이다.


----------------------------------------------------------------------------------------------------------------------




끝! 완성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90분 쓰고 나니 끝이 안났더라구요... 그래도 그대로 올리면 이후 전혀 안 쓸 걸 알아서 끝까지 다 썼습니다! 그래서 혼자 90분 더 썼네요 허허... 아무래도 시간이 늘더라도 저는 지각하지 않을까 했는데 결석생이 되어버렸습니다 후후... 그래도 전력으로 시작한거긴 하니까요...

'황립전력 90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 바다에 가야하는 이유  (0) 2017.06.18
[교복] 사러갑시다  (2) 2017.06.10
Posted by 잇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