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

"...그게 뭐냐?"

"뭐긴요, 요즘 애들 입는다는 교복임다!"


샤워하고 나온 카사마츠 앞에 느닷없이 키세가 못보던 옷을 입고 나타났다. 카사마츠는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그걸 한마디로 일축해서 물었고 카사마츠가 이미 아는 대답만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카사마츠는 제 뒷목을 쓸어내려 진정한 후 다시 물었다.


"요즘 애들이 입는 교복인 건 알겠는데 대체 그걸 네가 왜 지금 입고 있는 건데? 설마 입고 나가려고?"

"아앗, 일단 절 보라구요! 보면 멋지지 않슴까?"


포즈를 두어가지 취해가며 키세는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카사마츠에게 봐달라고 요구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해서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마저 제거할 뿐, 카사마츠는 딱히 반응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키세는 지치지도 않는지 카사마츠의 주위를 돌며 갖은 포즈를 취하며 '멋지지 않슴까?'를 연발했다.


"아, 그래, 참, 멋있네."

"하, 역시 타고난 모델 키세 료타! 아무도 나의 멋에서 헤어나올 수 없지!"


카사마츠는 일부러 딱딱 끊는 말투로 국어책 읽듯 대답해주었다. 그럼에도 키세는 '역시 난 멋져!'하는 반응으로 룰루랄라 흥에 겨워 춤을 출 뿐이었다. 춤추는 키세가 근처에 다가올 때를 기다려 카사마츠는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억 하는 소리도 못 내고 바닥에 나자빠진 키세는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었다. 카사마츠는 한숨을 내쉬며 누운채인 키세 옆에 주저앉아 물었다. 얄미운 볼을 꾹꾹 눌러주는 건 덤이었다.


"료타씨, 이제 그만 웃고 대답을 해주시겠어요?"

"후후, 아아, 볼 그만 찔러요! 아무튼, 이 키세 료타, 교복 모델로 부활! 이라는 검다."

"어제 스케줄 있다더니 그거였어?"

"넵! 오랜만이었지만 모델 키세료, 죽지 않았단 검다!"


매우 자랑스럽게 말하는 키세와 반대로 카사마츠는 점점 더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위에서 노려보며 추궁하는 카사마츠 뒤로 검은 오오라가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듯 했다.


"으음, 설마 페이 대신 교복 받아왔다거나 그런겁니까 료타씨? 으응?"

"에이, 그런 건 아니거든요? 이 교복, 맞춤제작이니까 어차피 팔 수도 없어서 받은 거라구요."


키세의 대답에도 카사마츠의 눈은 오히려 점점 더 가늘어졌고 눈초리도 곱지 않았다. 검은 오오라도 여전히 건재. 그 반응에 키세도 불만이란 표정을 하고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카사마츠는 눈에 힘을 풀지 않으면서 키세에게 다시 물었다.


"흐응, 그래서 왜 지금 입고 계신지? 혹시 저에게 이상한 역할극을 제안하시려는 건?"

"아잇 진짜, 유키오는 날 뭘로 보고! 기억난 김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유키옷찡 너무하야야야야악!"


키세도 발끈했는지 짐짓 토라진 척을 했다. 그러나 이상한 발음의 호칭을 부르자마자 키세는 옆구리 살을 한가득 꼬집혔다. 놓여난 후에도 키세는 아파 죽어갔지만 카사마츠는 정말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냉랭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거부했다.


"아, 그 발음 진짜 싫으니까 하지 말라고 했다."

"히잉 네..."


카사마츠가 정색을 하고 거부하자 키세는 처량한 개 흉내를 내며 끙끙거렸다. 그러다 잠시 후 알아서 회복한 후엔 카사마츠 옆에 달라붙어서는 전날 촬영이 어땠는지, 어디에 나갈건지까지 설명하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카사마츠도 응, 그래서, 하고 맞장구를 치며 열심히 들어줬다.


"이게 어제만 촬영한 게 아니라 사전 촬영도 했는데 그때 비디오 카메라로 전신 수치를 재는 장면을 찍는 검다. 그래서 그걸로 나가나 했는데 그건 티저로 나갈거래요! '어떤 체형이어도 입을 수 있는 교복'이 광고 카피라나? 그래놓고 저를 캐스팅하다니, 조금 양심없는 게 아닐까요? 아아 농담, 농담. 그렇게 '맞는 말이지만 때려주고 싶다'하는 표정으로 주먹 쥐지 말아요. 아, 맞아. 맞춘 교복이 와서 어제는 그걸로 촬영했슴다. 같은 브랜드에서 나오는 트레이닝 복 입고 농구하는 컷도 찍고요. 아니, 찍은 광고가 두 개인 건 아님다. 다 이 교복 광고에 쓸 장면이요. 에? 아니, 잡지 촬영은 없었어요. 교복 잘 되면 잡지촬영도 할 수 있다고는 하는데 그거야 모르죠. 그나저나 모니터로 봐도 저 여전히 끝내주게 잘생겼더라고요. 모델도 계속 했으면 탑급이었을 거 같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저. 아, 지금 하는 모델은 근육 있어도 상관 없는 것들이고 역시 운동선수 이미지로 나가는거니까요. 에엑! 립서비스란 건 저도 알거든요? 질투하는 척 하지 마요. 아아 그렇다고 바로 그렇게 철회하기 있슴까!"


둘은 한참이나 붙어앉아서 키세가 조절대고 카사마츠가 추임새를 넣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키세가 뭔가 생각났는지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왜, 뭐 어디 가야돼?"


급하게 시계를 확인하고 옷을 챙겨입는 키세를 보며 카사마츠가 덩달아 급해져서 물었다.


"아, 유키오도 빨리 나갈 준비 해요.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뭐? 아, 알았어."


키세가 재촉하자 카사마츠도 영문은 모른 채 옷을 챙겨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키세가 입는 옷을 보고 대충 그 수준에 맞추어 입자 키세가 차키까지 챙겨들고 나갔다. 서둘러 뒤따른 카사마츠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맬 때 까지 키세는 어디 간다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키세가 차를 출발시키고 나서도 한참이나 물어봐야한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도로를 한참 달리다 세 번째 신호에 걸렸을 때서야 카사마츠가 잔뜩 긴장한 채 질문했다.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 건데? 부모님 뵈러? 우리 점심 약속 있었나?"

"아뇨, 유키오 옷 사러요."

"뭐? 왜?"

"사야돼요."


너무 심플한, 그러니까 긴장할 만한 일도 아니고 별 사건도 아니고 약속이 있던 것도 아닌 게 분명한 대답에 카사마츠는 화도 낼 생각을 못하고 그저 반문했다. 그마저도 운전대를 잡은 키세가 단호하게 끊어버려서 카사마츠는 어쩌디 못하고 안전벨트만 부여잡고 있었다. 카사마츠는 '내 옷이 그렇게 없었나, 이번에는 목 늘어난 티는 없었는데, 바지가 문제인가?'하고 무척 고민하느라 더 말을 붙일 생각도 안 들었다.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키세를 따라 건물 3층에 도착하니 왠지 교복매장이 잔뜩 있는 곳이 나왔다. 매장 몇 개를 지나칠 때 까지도 여기에 살 게 있겠거니 하던 카사마츠는 어디서 본듯한 교복 매장이 나오자 당황했다. 아까까지 키세가 입고 자랑하던 교복이었다. 마네킹에 입혀진 핏은 키세가 입은 것보다 폼이 안 났지만 그 교복이 맞았다.


"어, 어, 료타? 여기는 교복 매장인데?"


카사마츠가 당황한 사이, 키세는 벌써 매장의 카운터까지 가서 직원에게 무어라무어라 하고 있었다. 카사마츠가 자기 말을 못 들었나 싶어 키세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예상치 못하게도, 한쪽에 쳐진 커튼 뒤로 끌려들어가 치수를 재게 됐다.


"잠시만 팔을 들어주세요, 턱 당기시고, 숨 들이쉬고, 팔 내리세요."

"네? 네, 넵!"


키세가 뒤에 버티고 있는 탓에 대뜸 지시하는 직원의 말에 엉겁결에 따르긴 했는데 심상치가 않았다. 직원은 또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키세와 몇 마디 주고 받고는 또 사라졌다.


"료타, 너 뭐하는 거야 이게?"

"유키오 선배 교복 사주려고요."

"내가 왜 교복을...? 너 또 뭐하려고!"


화난 카사마츠가 따지려고 들었지만 키세는 태연하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미 했는걸요?"

"너...!"

"사이즈 맞는지 입어보시겠어요?"


키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어느새 또 직원이 와서 카사마츠에게 교복을 내밀었다. 탈의실에 강제로 집어넣어진 카사마츠는 '도와드릴까요?'라는 직원의 목소리에 아니라고 급히 거절하며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몸에 딱 맞는 교복 자켓을 입으면서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오며 보니 키세가 결제까지 끝낸 후였다.


"와, 고객님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리세요! 원래도 키가 크신데 저희 교복 입으시니까 더 다리 길어보이신다. 어깨나 등도 붙는 느낌 없으시죠? 팔 들어보세요. 돌려보시구요. 괜찮죠? 여유가 있어서 그래요. 그런데도 여기 이렇게 라인이 살아서..."


또 다시 옆에 붙은 직원의 칭찬인지 자랑인지 모를 세례와 질문공세에 대답하느라 얼이 빠진 카사마츠는 '불편한 곳 없으시죠?'하는 물음에 '네'하고 순순히 대답하고 말았다. 정말로 불편한 곳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키세에게 끌려서 다시 차로 돌아가게 됐다.


"뭐 한 거야?"

"선배 교복을 샀지요! 저랑 커플교복!"


키세는 가는 내내 싱글벙글 웃으며 카사마츠와 자기가 커플 교복을 갖게 됐다며 아주 신이 났다. 중고등학교 교복은 둘 다 버려서 없었는데 이제 만우절 같은 때에 교복 이벤트를 할 수 있게 됐다며 조잘조잘 입을 쉬질 않았다.


"근데 료타, 있잖아, 그래서 교복을 산 이유가 뭐라고...?"


카사마츠가 낮아진 목소리로 음산하게 물었다. 그러나 키세는 그 분위기를 감지 못하고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 대답이 무슨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르고 말이다. 키세의 대답을 들은 카사마츠는 냅다 키세의 옆구리를 꼬집었고 키세는 조금 전까지의 승리감은 흔적도 못찾고 옆구리의 아픔과 생명의 위협을 동시에 느껴야했다.


"그야 물론 유키오랑 교복플레이를 하기 위해서죠! 음후훗! ...으아악, 잠깐 유키오! 지금 운전중! 으악! 선배!"

"죽어! 죽자! 이 나이 먹고 교복플레이 한다고 애들 교복을 사냐!"

"아앗, 잘못했어, 잘못했어, 잘못했다구요! 이러다 사고나서 죽어요!"

"난 쪽팔려서 죽을 거 같으니까 그냥 죽어!"


한바탕 차안은 난리가 났지만 마침 신호대기에 걸려있던 키세의 차는 아무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키세만 혼자 운전대와 옆구리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을 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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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잇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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