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에]
카이조 농구부 빗속의 쇼 소동
남는 우산 있냐는 질문에 '응'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었다. 차마 아르바이트를 가야하는데 우산이 없다며 부탁할 사람이 없는지 자신에게 부탁해오는 같은 반 여학생을 무시할 수 없었다. 코보리와 모리야마에게 빌리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 둘 모두 여분 우산이 없을 줄이야. 여분 우산은 커녕 자기들 쓸 우산도 없다니...
카사마츠는 우산은 커녕 우산 대용으로 쓸 천조각도 없는 사물함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눅눅한 공기 때문에 한숨을 쉬어도 시원한 기분이 아니었다. 남는 우산이 있을 줄 알았다. 요전에 우산을 학교에 갖고 와서 안 가져간 기억이 있어서 그랬는데 기억에만 없을 뿐 집에 가져간 모양이었다. 아침에 본 일기예보에서 오후부터는 지나가는 소나기가 한 차례 온 후엔 비 올 확률이 무척 낮다고 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게다가 두 시 부터 내리던 비가 부 활동이 끝나고 나서도 그치질 않았다.
소나기? 이게? 코웃음이 아니라 너털웃음이 나올 정도로 비는 세차게 내렸다. 체육관에 있을 때도 점점 둔하고 크게 울리는 빗소리에 예상은 했다. 비는 아까보다 거세졌으면 거세졌지 빗발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창문에 부딪혀 흐르는 비에 시야가 가려서 밖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 어둡고 흐릿한 창 밖의 풍경 속에 교복입은 형체 몇이 운동장 쯤을 뛰어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카사마츠도 저렇게 뛰어서 집에 갈까 하고 부활동 전에 하던 생각을 다시 해보았지만 그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내일 오전 연습도 그렇고 주장의 책임도 그렇고 수험공부에도 지장이 가니 곤란했다. 배가 고파서 화가 날 지경이었지만 오늘 이후를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배고픈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생각하며 자제심이란 것을 꼭꼭 붙들고 있었다.
교실 열쇠를 돌려놓는다는 핑계로 선생님들이 있을 만한 곳곳을 찾아보았지만 당직 선생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최대한 공손하게 남는 우산이 있는지 물었지만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분실물로 들어왔다는 우산도 살만 남거나 천만 남은, 그것도 둘을 어떻게 고쳐서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정말 머리만 가리려면 쓸 수도 있었겠지만...
카사마츠는 포기하고 체육관으로 돌아갔다. 남은 녀석 중에 한 녀석은 먹을 거라도 갖고 있겠지.
락커룸에는 아무도 없었다. 깔끔하게 닫혀있는 사물함들에, 여기저기 줄 맞춰 놓아둔 농구부 녀석들의 짐 뿐이었다. 본인의 사물함을 열어서 가장 안쪽에서 커피맛 사탕 하나를 찾아먹고서야 상황을 살피니 그랬다는 것이었다. 비 때문인지 사람이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가 울리는 체육관에도 사람은 없었다. 아까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던 사람들 중에 농구부가 있다기엔 락커룸에 아까 우산 없던 부원들의 짐이 전부 그대로 있었다. 체육관도 해산 전에 후배들이 정리해둔 깔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다가 밖으로 조금 열려있는 문을 발견했다.
그 문을 나서고, 카사마츠는 눈 앞이 깜깜해졌다.
“우~ 선배 저 섹시하지 않슴까? 여고생들이 지금 절 보면 쓰러질 검다!”
농구부 유니폼도 벗지 않은 키세 녀석이 무슨 화보를 찍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키세 뿐이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키세는 카사마츠의 눈에 잘 띄었다. 빗속에서 잘 뜨이지도 않을 눈을 흘겨 뜨고는 '필살 매혹 포즈'라거나 '충격의 뇌살빔'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 저 미친놈... 카사마츠는 뒷목으로 갑자기 피가 쏠리는 것 같았다. 아직 집에 안 간 농구부 후배녀석 전부가 키세 뒤에서 '후광효과'라거나 빗속의 촬영 컨셉을 잡는 모습으로 놀고 있었다. 정말 놀고 있었다. 카사마츠는 들은 것도 없는 속이 아파온다고 생각했다.
“그래! 바로 저거야! 저러면 인기가 많아진단 말이지? 나도 비에 젖어야겠어!”
“......”
거기에 앞뒤 분간 못하는 녀석 하나 추가요. 앞으로 가려는 모리야마를 코보리가 말 없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잡아 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학년 선배에 수험을 앞둔 건 마찬가지인데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코보리가 잡은 저지를 벗고 거의 샤워기 수준으로 쏟아지는 물의 장벽 속으로 뛰어들려는 것을 이미 빗속에서 난리 부르스를 추는 후배 놈들이 반기고 있었다.
평소라면 카사마츠가 등장하자마자 발견하고 누구든 반응을 했을 건데 이 중 아무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유일하게 제정신으로 보이는 코보리 말고는 빗줄기에 취한 건지 농구부 유니폼을 입고 단체로 쇼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 옷 입고 할 것이지 농구부라고 단체로 광고하나... 카사마츠는 누가 봤을까봐 입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배도 고픈데 입까지 마르고... 그야말로 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상태로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면 이성까지 같이 날아갈 것 같아 양 주먹을 아주 천천히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어? 카사마츠 선배!”
모리야마가 말리는 코보리를 끌고 빗속으로 뛰어든 것과 키세가 카사마츠를 발견하고 손을 흔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카사마츠가 키세를 향해 달려갔다. 맹렬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임마,
키세에에에에에에에!!!”
"우왁, 잘못했음다 선배!"
키세는 거의 본능적으로 잘못했다고 말하며 도망쳤다. 습기로 눅눅했던 교복이 순식간에 푹 젖었다. 온 몸에 달라붙는 교복이 불편하고 무거웠다. 그렇지만 눈 앞에 농구부 유니폼을 가슴께까지 말아올리고 도망가는 키세를 놓칠 수야 없었다. 시야 가장자리로 모든 걸 포기한 표정의 코보리가 모리야마를 물 웅덩이에 내던지는 것을 보았다. 키세도 봤는지 조금 속도가 느려졌고 카사마츠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온 몸으로 키세에게 태클을 걸었다. 에이스를 다치게 할 순 없으니 온 몸으로 키세를 받아내며 쓰러졌다. 받아냈다기보다 끌어내렸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카사마츠는 땅 속에서 튀어나와 낚아채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려는 생물처럼 키세의 허리를 낚아챘다.
"......"
"......"
카이조 농구부원 중 어느 누구도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보며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때까지 시야 분간이 어렵도록 내리던 비가 서서히 그 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어두웠던 비구름이 햇빛이 나올 틈을 만들었고 몇 줄기 햇살이 운동장으로 비와 함께 내렸다. 그것이 하필이면 운동장 위에 겹쳐 쓰러진 농구부의 두 사람을 비췄다.
"야, 저거 아무래도... 겹친 거 같지?"
모래와 물로 범벅이 된 모리야마가 코보리에게 입모양으로 '입술'이라고 뻐금거려 보이며 말했다. 코보리도,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나머지 부원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사마츠가 폭발하기 전에 운동장 바깥으로 뛰어 달아났다. 정확히는 다 정리한 체육관 안으로. 코보리가 문을 닫은 직후 운동장 쪽에서 무서운 괴성이 들려와 모두들 몸을 떨었다.
"키세에에에에에에!! 이것들이!"
"피해자는 저라구요오오오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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