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조는 이유

주변에서 대화하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정확한 대화 내용은 음악 소리에 묻히지만 그 음악 소리도 그리 크지 않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발랄한 대중가요지만 누구의 귀도 확 사로잡을 정도로 들리진 않는다. 이어폰을 꽂으면 거의 들리지 않는, 다른 음악을 듣는 데는 방해되지 않는 정도의 음악 소리. 그 때문에 카사마츠는 이 카페를 좋아한다. 특히 이 창가 자리를 제일 좋아한다. 음악 소리가 나오는 스피커에서도 그라인더 소리가 울리는 카운터에서도 제법 멀어 햇살을 받으며 졸기 딱 좋은 위치다. 이어폰을 굳이 끼지 않아도 의자 등받이에 기대 눈을 살짝 내리 깔고 있으면 졸음이 눈꺼풀에 매달려 엉뚱한 장면을 보여준다. 펼쳐놓은 노트에 다른 공식을 적용해 문제를 풀거나 오선지로 변한 노트에 음표로 필기를 하고 있는 자신이 보인다. 꿈이다. 꿈에서 깨면 창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비슷한 시간에 지나가는 비슷한 사람들. 다른 시간에는 카사마츠도 저 사람들 처럼 이곳을 지나갈 것이다.

가만히 졸고 있으면 햇살이 강한 날에는 직원이 살짝 와서 블라인드를 내려주고 간다. 그러면 밖이 잘 보이지 않아 더 졸 마음이 들지 않는다. 눈 앞의 일에 집중하게 된다. 문제를 풀고 푼 것을 타자로 옮기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가끔 핸드폰을 확인하거나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을 빼면 블라인드가 다시 올라갈 때까지 조는 일은 없다. 다만 카페의 문 근처로 누군가 다가오면 버릇처럼 살짝 눈을 감는다. '어서오세요' 하는 직원의 목소리와 문이 열리면 가볍게 딸랑이는 풍경 소리에 섞여드는 들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숨소리 같은 것들을 듣는다. 일부러 듣는 것은 아니지만 들을 의도가 전혀 없다고도 못한다. 눈을 뜨면 들었던 소리들로 상상했던 것이 보인다. 추운 숨을 내쉬며 바깥 공기를 카페 안에 털어내는 사람들. 문에서 조금 떨어진 카사마츠 쪽은 돌아보지 않고 곧장 안쪽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들. 카운터를 찾아가는 작은 소란. 그 안에 카사마츠가 찾는 것은 없다. 물론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것도 아니다.

구름이 끼고 해가 나지 않는 날에도 창가 자리는 카사마츠의 차지다. 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쪽 창가 자리. 카운터와 스피커에서는 멀지만 창가를 마주보고 난 좁은 자리라 전용석이라 해도 될 정도로 다른 사람은 앉지 않는다. 문이 열릴 때마다 눈을 감고 드나드는 사람들의 소리를 곁귀로 듣는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때문에 인상을 쓰기도 하지만 미간을 펴줄 사람은 지금 없기때문에 의식적으로 표정을 누그러뜨린다. 창 밖으로 누가 들어올지 이미 보았더라도 카사마츠는 문으로 누가 다가올 때마다 눈을 감는다. 감은 눈에 비치는 빛은 햇살이건 전등이건 움직이는 실루엣을 기대하게 한다.

몇날이고 며칠이고 같은 장소, 같은 자리에 대부분의 메뉴를 마셔도 카페 자체는 카사마츠가 여기 오는 이유가 아니다. 카사마츠가 창가 자리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기 전, 혼자 졸던 시간 보다도 더 짧은 시간동안 함께 했던 사람이 이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했었기 때문도 아니다. 카사마츠가 아는 기다림의 장소가 여기뿐이기 때문이었다.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과제를 하다가 졸고 있으면 함께 왔던 사람은 어느 새 화장실을 갔는지 소리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반 정도는 화장실에 다녀왔고 드문드문 새 메뉴를 주문하러 카운터에 갔었고 또는 드물지 않게 전화를 받으러 나간 것이었다. 지금은 같이 오지 않는 그 사람은 그랬었다. 

눈을 감고 졸고 있으면 누군가의 기척에 눈이 뜨이기 마련이다. 일행이건 아니건. 맞은편 자리를 비운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던 것은 반은 졸음 때문이었다. 완전히 감기지 않은 눈꺼풀 사이의 아주 작은 틈, 그 틈으로 현실을 보고 있었다. 밀려드는 꿈 사이로 맞은편 자리의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사람이 마법처럼 나타나있는 것. 그것이 카사마츠가 기대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카사마츠의 맞은편엔 자리가 없다. 이제 그가 기대하는 것은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은 창 밖에서 완전히 감기지 않은 눈꺼풀의 틈으로 누군가를 발견하거나, 감은 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가리며 만들어내는 누군가의 실루엣을 보거나,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만드는 기척이 귀에 익다고 생각할 그런 누군가가 카사마츠의 등 뒤로 와 아는 척을 하는 일이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병원에서는 아직 한 달은 더 꾸준히 회복되어야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카사마츠는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보다 그 짧은 시간이 더 긴 것 같다. 햇살로 착각하게 만드는 머리칼을 찰랑이며 저 창밖에 다시 그가 서 있게 될 날은 아직 멀었다. 한 번도 무엇이 카사마츠에게서 그를 앗아간 적은 없지만 카사마츠에게 기다림을 남기긴 했다. 언젠가는 졸고 있는 그를 깨우러 오는 익숙한 발소리가 풍경소리에 섞여 들리길, 카사마츠는 아직 기다리고 있다.

'황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립] 커피와 초콜렛  (0) 2016.04.13
보름장  (0) 2016.01.08
[황립] 반인반요(반은 사람이고 반은 이불)  (0) 2015.12.13
황립 운명의 날(11/11)  (0) 2015.11.11
[황립] 뽀뽀 (7/29 카사마츠 선배 생일 기념 연성)  (0) 2015.07.29
Posted by 잇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