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반요(반은 사람이고 반은 이불)>
'겨울 햇볕이 참 좋구나.'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볕을 받으며 카사마츠는 몸을 한 바퀴 굴렸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꽤 많이 벗어낫지만 해는 여전히 몸 위에 내리쬐고 있었다. 방 가득 들어오는 햇살이 겨울 답지 않게 따끈따끈했다. 큰 창이 있는 집을 고른 건 잘 한 일이었다. 이만한 건 받을 자격이 있다고 카사마츠도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뻗어 누웠던 자리에 남은 이불을 끌어당겼다. 팔다리를 꾸물대며 이불을 몸에 감았다. 살짝 식은 이불이 햇볕에 데워진 몸을 딱 좋게 감쌌다. 키세의 고집으로 방바닥 한 쪽에 놓은 작은 디지털 시계가 한시 반을 나타내고 있었다.
'딱 두 시 까지만... 이러고 있자.'
머리쪽이 허전해 이불을 이리 저리 끌어모아 베개 대신 삼아보았다. 발쪽이 허전해져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발끝으로 이불을 모아 덮으니 머리도 발도 포근하고 안락한 카사마츠의 둥지가 만들어졌다. 제자리에서 꼼지락거리느라 저절로 썼던 인상도 스르르 풀어지고 웃음이 났다. 키세가 보면 침실 두고 여기서 뭐하냐고 잔소리 들을 게 뻔했지만 포기할 수 없는 휴일의 즐거움이었다. 물론 두 시는 세 시가 되고 또 시간이 흘러 키세가 올 시간이 다 되었다.
칠 년은 긴 시간이지만 지나보면 그 길이를 잊게 되어 길었는지 잘 모르는 시간이다. 딱 칠년은 아니었고 그보다 조금 길지만 카사마츠는 키세처럼 날짜를 그렇게 세세하게 세진 못하니까 칠 년이라고만 안다. 얼마전에 키세가 작은 케이크를 사온 것만 기억났다. 그러니 대충 그 언저리 일 것이다. 그 칠년 간 같이 있으려고 두 사람이 얼마나 노력했던가. 고작 고등학생인 키세와 대학생인 카사마츠가 할 수 있던 건 많지 않았다. 원거리가 힘드니까 집을 얻어서 같이 살자. 그것이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건 생각보다도 더 힘들었다.
우선 키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원거리 연애를 했다. 그 동안 둘이 살 자취방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자고 생각하고 일하던 카사마츠가 경비를 줄이겠다며 기숙사에 덜컥 들어가 키세가 졸업하고도 같이 살지 못하게 됐지만 말이다. 본말전도라며 키세가 화를 냈고, 카사마츠는 그렇게 어려운 단어도 이제 아냐고 놀렸다가 선배 기숙사에서 쫓겨나게 하겠다며 키세가 붙들고 늘어지는 통에 그 날 기숙사 통금에 맞춰가지 못했었다. 그래도 그 날의 결론이 열심히 모아서 키세가 대학 졸업할 때 까지는 같이 살 집을 마련하자는 것이어서 마음은 가벼웠다. 키세는 대학 농구팀에서도 활동하고 모델일도 틈틈이 해서 돈을 모았다. 카사마츠의 경우에는 길거리 농구의 상금과 동네 농구 대회의 상금을 주로 노렸다. 심지어는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받은 상품도 돈으로 바꿨다. 그걸 다 저축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스위츠도 절대 사먹지 않았다. 동생들에게 너그럽게 주던 것도 돈이 들어갈 만한 것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게 돼 덕분에 집에서 수상하다는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는 대학 동아리나 과로 들어오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되어 사정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카사마츠 입장에선 키세보다 덜 저축하는 것이 될까봐 늘 초조했다. 주말의 하루는 키세와 데이트를 하러 나가야 했고 나머지 하루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취업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취업하고 나서는 신입사원이라 정신이 없었고 갑자기 이직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래도 키세가 졸업한 올 해 드디어 같이 살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카사마츠는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돈을 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키세도 그 점을 신경쓰는 것 같았지만 카사마츠는 모른척 했다. 남자의 자존심, 연상의 자존심이란 거다. 대신 휴일에 이렇게 널브러져 있는 건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새 집 냄새가 완전히 빠지지 않은 신축 빌라에서 해를 받으며 늘어져 있는 건 무척 좋았다. 부자가 된 기분에다가 여유롭게 호사를 누리는 것 같아 뿌듯했다. 그 동안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카사마츠 본인이 생각해도 정말 독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하고 어떻게 칠 년은 보냈는지 새삼 키세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카사마츠는 기울어진 해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이불을 풀지도 않고 모은 채로 벌레마냥 꾸무럭 꾸무럭 아주 조금씩 이동했다. 키세가 이불이 망가지고 더러워진다고 아주 질색을 하며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키세가 볼 때마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 카사마츠가 그럼 이불을 따로 쓰자고 했다가 침실을 따로 쓰게 될 뻔 했다. 결국은 카사마츠가 벌써 망가트린 이불 한 채가 휴일 전용 이불이 됐지만 말이다. 귤도 그 안에서 까먹어서 여기저기 귤물이 들어있었다. 저번에 케이크도 이불을 두른 채 먹다가 결국 흘리고 말았다. 키세는 절대 안 빨아준다고 눈을 흘겼지만 카사마츠가 아무 생각 없이 휴지로 벅벅 문질러버려서 기겁을 하고 그 부분만 빨래를 해주었다.
'그건 내가 생각해도 심했네.'
하지만 그렇다고 이불에서 나갈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화장실 갈 때는 이불을 덮고 있을 수 없으니까 누릴 수 있을 때 많이 누려둬야 했다. 막 같이 살게 된 지난 겨울보단 이번 겨울이 좀 더 이불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고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카사마츠는 휴일만 그러는 거니 괜찮지 않냐고 스스로 변명을 해보았다.
현관에서 소리가 나서 이불을 만 채로 방문 밖을 보니 키세가 들어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시간. 생각보다 조금 늦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고개를 내젓고 있는 폼이 벌써 이러고 있는 걸 본 모양이었다.
"어, 왔어?"
지난 겨울이었다면 키세가 오는 기척만 들려도 벌떡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현관까지 달려나갔을 것이다. 이제는 키세도 이런 카사마츠가 익숙해졌다는 걸 알기에 그러진 않았다. 대신...
"어, 이불벌레씨 말도 할 줄 알아요? 입이 생겼네. 아침엔 없었는데."
이렇게 놀렸다. 아침에 비몽사몽간에 뽀뽀도 안 해주고 보낸 게 마음에 조금 걸리더라니. 키세는 현관에서 코트를 벗고 모자와 목도리까지 두어번 털어서 가지고 들어오는 깔끔쟁이였다. 카사마츠가 씻지도 않고 있는 걸 보면 또 한숨을 푹 내쉬며 욕실로 끌고 갈 게 뻔했다. 그러면 카사마츠는 씻는다는 핑계로 키세가 저녁준비를 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오늘은 카사마츠를 놀려먹기로 마음 먹었는지 옷까지 갈아입고 카사마츠가 굴러다니던 방으로 들어왔다. 카사마츠는 괜히 경계심이 들어 이불을 폭 쓰고 앉았다. 얼굴만 내놓은 꼴을 본 키세가 웃었다. 이불 한 끝을 슬쩍 잡아당기기에 카사마츠는 그쪽으로 굴러서 방어했다. 웃음을 참으며 다른 쪽 이불을 끌어당기는 키세를 보고 몸을 뒤로 물려 이불을 뺏어왔다. 그러느라 머리가 이불 밖으로 다 나왔다.
"안 씻고 이러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물 닿으면 죽어요?"
"저녁에 씻을 거야아... 저녁은, 먹었어...?"
"아니요. 아직."
말꼬리를 늘리며 키세 눈치를 보는데 카사마츠를 당장 욕실로 끌고 갈 생각은 없는듯 했다. 그렇다고 저녁 준비할 생각도 없는 듯 했다. 카사마츠가 아예 이불째로 눕자 키세가 물었다.
"화장실은 갔어요?"
"아침에."
"그러고 지금까지 계속 이러고 있었어요? 밥도 안 먹고?"
"응. 헤헤."
카사마츠는 사실 컵라면을 꺼내서 점심도 먹고 화장실도 두 번 더 다녀왔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키세가 냉큼 욕실에 밀어넣고 밥 준다고 하지 않을까 하고 해본 것이었다. 키세가 눈을 흘기더니 카사마츠를 이불 째로 마구 간질였다. 별 영향은 없었지만 안 그러던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불이랑 일심동체네. 나랑이 아니라."
키세가 눈을 흘기며 삐진 체를 했다. 그렇지만 카사마츠는 눈만 좌우로 굴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하든 마음에 들지 않는 전개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치, 아주 반인반요네."
"야, 내가 요괴야?"
"아니, 선배 반은 사람이고 반은 이불이라구요. 아주 자기 몸처럼 달고 다니잖아."
카사마츠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낄낄거렸다. 이불에서 손만 빼내 키세 얼굴을 잡고 뽀뽀를 했다. 키세는 씻지도 않고 뭐하냐며 괜히 밀어냈지만 결국 마주 뽀뽀해주고야 풀려났다.
"아 얼른 씻고 와요. 밥 차려줄게."
키세가 웃으며 일어서자 그새 귀찮아진 카사마츠는 이불에서 좀 더 뒹굴 핑계가 없을까 하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나는 반인반요라 물에 닿으면 젖어."
"...흠흠."
그런데 키세가 그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혼자 얼굴을 붉히더니 헛기침을 하며 카사마츠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 아닌가. 카사마츠는 왠지 불안해져서 이불을 꼭 잡고 눈을 굴렸다. 그런데 그럴 때가 아니라 도망갈 때였다.
"으악? 야, 잠깐, 잠깐만!"
"쉿, 괜찮아요. 이불은 버, 벗길검다."
키세는 이불 째로 카사마츠를 들어다 어깨에 메고 욕실로 향했다. 이불은 벗긴다는 말을 더듬는 걸 보니 필시 야한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카사마츠는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지만 자기 스스로 꽁꽁 싸둔 이불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야! 밥! 밥은!"
"반인반요가 물에 닿으면 젖는대서 진짜인지 실험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키세는 이불을 풀자마자 도망가려는 카사마츠를 잡아서 욕실 안으로 밀어넣었다. 곧이어 들어간 키세가 욕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카사마츠가 문고리를 돌리는지 몇 번 시끄러운 소리가 났지만 아무것도 욕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안에서는 물줄기 소리 사이에 카사마츠의 고함소리가 몇 번 섞였지만 이웃을 의식해서인지 곧 물소리 외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욕실 밖에는 카사마츠가 덮고 뒹굴던 이불 한 채만 러그와 함께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다. 이불 한 쪽에는 언제 튀었는지 컵라면 국물 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오늘은 아직 토요일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반인반요의 흔적이 남을지, 혹은 그렇게 되도록 키세가 내버려두지 않을지 욕실 안의 두 사람은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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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반요는 요새 트위터에서 흥하고 있는 드립입니다 사실 요는 까는 이불을 이르는 말이고 인/욕/금 등의 침구를 칭하는 한자어가 각각 따로 있지만 드립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가져다 써보았습니다
아웅님을 위한 휴일의 반인반요 카사마츠!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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