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전력 60분

키워드[타임머신]

그대의 미소는 나의 타임머신


'나를 그 날로 돌려줘요.'

'나에게 다시 한 번 그렇게 웃어줘요.'


방 구석의 모서리까지 깔끔히 돌린 청소기의 전원을 내렸다. 환기를 하려고 열어둔 커다란 창문으로 햇살도 바람도 함께 쏟아져 들어왔다. 꼼꼼하게 정리해둔 침대 시트 위의 베개 가장자리가 바람에 뒤집혔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키세는 청소기를 챙겨들고 침실을 나섰다. 나서면서 방문이 닫히지 않게 문 아래에 책을 몇 권 괴어두는 걸 잊지 않았다. 카사마츠가 자주 보던 농구 잡지의 최근 몇 권이었다.

창이 넓고 남향까지는 아니지만 햇빛받기 좋은 방향인 덕분에 집은 채광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불을 다 껐는데도 집 안은 환했다. 베란다에 널어둔 이불도 햇빛을 잘 받으며 마르는 중이었다. 카사마츠의 것과 세트로 산 머그컵에 물을 마시며 그 광경을 보는 키세의 마음도 잘 마르고 있었다. 꽉 채워 한 컵을 마시고도 키세는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다.

카사마츠는 거뭇해진 눈 밑을 문질러가며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숫자와 또 영어와 씨름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서랍 가득 쌓아둔 사탕이니 과자니 초코렛은 꺼내지도 못하고 대용량 텀블러에 타둔 커피만 겨우 홀짝이며 아픈 손목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었다. 한 달 반 동안 카사마츠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조합해보면 그런 꼴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도 야근일텐데 갈아입을 셔츠는 제대로 가져갔는지 또 넥타이라도 잃어버리고 오는 건 아닐런지... 키세는 한가롭고 평화로워야 할 짧은 휴식기를 카사마츠 걱정으로 채우며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야근. 셔츠 고마워.'

별안간 울린 알람에 메세지를 확인했지만 카사마츠가 이례적으로 일찍 퇴근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셔츠는 잘 가져갔네요."

물을 또 한 모금 마시며 키세는 소파에 앉았다. 혼잣말도 습관이 되어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연인과 알콩달콩 할 줄 알았던 휴가는 하필 연인이 취업 후 제일 바쁜 시즌을 맞이하는 바람에 쓸쓸한 휴가가 되어버렸다. 쉴 날은 아직 두 달쯤 더 남았지만 키세는 차라리 어서 복귀해버리고 싶었다. 정말 보내고 싶은 말을 누르고 키세는 다른 말을 보냈다.

'뭘요, 오늘도 힘내요.'

이제 키세도 메세지에 하트나 이모티콘을 잔뜩 붙일 힘이 없었다. 보내더라도 거기에 반응할 힘이 카사마츠에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 상투적인 말 밖에 보낼 수 없었다. 눈밑이 시큰해져 키세는 고개를 숙였다. 볼 사람도 없었고 눈물이 흐르지도 않았지만 고개를 숙이니 햇빛이 덜 눈부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키세는 그대로 눈을 감고 몇 년 전을 떠올렸다. 트로피를 들고있는 가장 빛나던 자신과 그 옆에서 태양처럼 눈부시게 웃어주던 카사마츠를. 손에 쥐어진 머그컵에 커다랗게 인쇄된 그 때의 카사마츠와 자신을.

>추가

카이조는 키세가 3학년이던 해의 윈터컵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세이린에게 직접 리벤지는 하지 못했지만 토오를 꺾고 최강자의 자리에 드디어 올랐다. 키세를 필두로 유망주 1학년들이 이끈 코트는 그야말로 카이조의 무대였다. 트로피는 그 날 많은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다니며 카이조 기념사진의 주인공을 차지했다. 카사마츠가 키세와 찍은 사진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키세는 그 사진을 가장 좋아했다. 카사마츠는 졸업한 지 2년이 지났고 자신은 다른 아마추어 팀에서 뛰고 있으면서도 카이조의 우승을 자신의 우승처럼 기뻐했다. 타케우치 감독은 당연한 거라며 기념사진을 찍을 때 카사마츠도 넣고 찍어버렸지만 키세에게는 느낌이 남달랐다.

그 날 다른 사람들이 찍어준 사진에서도 내내 카사마츠의 시선은 키세에게 꽂혀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카사마츠, 웃는 카사마츠, 키세의 목에 팔을 거는 카사마츠... 수 많은 카사마츠가 키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자랑스럽게, 기쁘게, 그리고 환하게. 그 중에서도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사진은 사진사가 연출한 것 마냥 멋지게 나왔다. 우승 트로피를 내미는 키세와, 그런 키세의 어깨를 한 손으로 두드리며 웃는 카사마츠.

'선배, 제가 해냈어요. 해냈다구요!'
'그래, 약속 지켰네. 아주 잘 했어!'

그런 대화를 하는 중에 찍힌 사진이었다. 카사마츠는 키세의 얼굴이 옆모습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키세가 우겨서 머그컵에 넣어버렸다. 키세에겐 그 때가 아주 상징적이고 소중한 순간이었다. 누구보다 커 보였던 뒷모습과 누구보다 쓸쓸하게 보였던 뒷모습을 이제는 죄책감을 가지고 떠올리지 않게 됐다. 자신만의 약속이라고 생각했던 걸 선배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에도 감동받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물론 태양처럼 환하게 보였던 카사마츠의 웃음이었다. 사진에는 키세가 본 그 빛과 따스함이 나오지 않았지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키세는 그 날 저녁에 드디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카사마츠에게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카사마츠 선배, 좋아함다! 그 동안 쭈욱 좋아했슴다.'

카사마츠는 오래 기다리게 했다며 타박처럼 키세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이 사진만 보면 키세는 그 날의 일을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승리의 감격도 우승했다는 기쁨도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카사마츠의 얼굴도 고백 후의 따뜻했던 포옹도.

지금은 우승 트로피도 카사마츠도 없이 혼자 집에서 청소나 하고 있어야 했다. 머그컵의 사진만 키세의 추억을 자극할 뿐이었다. 그 때 키세는 모 스포츠웨어 브랜드에서 농구화 광고부터 시작해 해당 브랜드의 전속 스포츠웨어 모델로 유명세를 탔다. 아이돌 모델 쪽의 일도 덕분에 잘 되어 키세가 지금 탤런트로 자리잡게 된 기반이 되어주었다. 바쁜 스케줄도 카사마츠를 위해 강철체력으로 소화했고 그 덕분에 카사마츠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해부터 같이 살게 된 이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카사마츠는 사회 초년생이라 바빴고 키세는 신인 탤런트로 한참 바쁠 때여서 집에 같이 있는 시간은 무척 적었다. 그 때도 지금보다는 얼굴을 많이 봤고 지금보다는 더 행복했다. 적어도 키세가 생각하기는 그랬다.

'선배 춥죠? 지금 따뜻한 호빵 샀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길 미끄러우니까 뛰지 말고 걸어서 와.'

먹고 바로 다시 촬영을 나가야했지만 같이 호빵을 먹은 겨울.

'너희 어머니가 수박 보내주신거 잘라서 냉장고에 넣어뒀어. 일어나면 같이 먹자.'
'그 말 하려고 여태 안 자고 기다렸어요?'
'얼굴도 하루에 한 번은 봐야지.'
'으와... 선배가 최고예요!'

카사마츠 혼자 키세 어머니를 집에서 맞이했던 여름 날. 카사마츠는 새벽까지 비몽사몽간에 키세를 기다려서 기어이 얼굴을 보고 잠들었다.

'야! 너 몸이 이렇게 불덩이인데 어딜 나간다는거야?'
'오늘 진짜 중요한 촬영이 있어요. 이거 정말 중요한 기회라구요. 갔다올게요.'
'야! 키세!'

키세가 38도까지 열이 오른 상태에서 일하러 가서 둘이 싸웠던 날. 다행히 키세는 해열제를 먹고 열이 내렸지만 카사마츠는 화가 단단히 나서 회사에까지 따지러 갔었다.

'엉엉 저는 선배 잃어버린 줄 알고...'
'이 바보야 엉엉 집으로 오면 되잖아...'

카사마츠의 핸드폰이 고장나 맡기고 오는 길에 인파에 휩쓸려 서로를 찾아 헤메다가 집 앞에서 간신히 재회해 붙들고 울었던 날.

'키세, 나 합격했어.'
'우와 축하해요! 내가 그랬잖아요 선배 될거라고.'
'임마, 나도 될 줄 알았어!'

한 동안 백수였던 카사마츠가 재취업에 성공한 날. 맥주로 간단하게 축배를 들었던 것이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여유로웠던 시간이 될 줄은 몰랐다. 카사마츠에게서 다시 메세지가 왔지만 별로 희망찬 소식은 아니었다. 키세는 점점 노랗게 져가는 해를 보며 창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그래도 오늘까지만 야근하면 될거래.'
'나는 괜찮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십셔.'

키세는 다시 돌아간다면 카사마츠가 그 회사에는 지원하지 못 하게 할 거라고 다짐했다. 과거의 일에 각오를 다져봐야 헛된 것이지만 키세는 절실했다. 이제 메세지로만, 그것도 하루에 몇 번 못하고 지내는 건 싫었다. 아무리 신입이고 바쁜 때라지만 이렇게 굴려먹어도 되는 건지... 카사마츠 말로는 정말 오늘만 지나면 된다고 했지만 야근을 한다는 걸 보면 오늘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휴일인데 자는 연인을 깨우지도 못하고 깰까봐 조심스레 몸을 뒤척이는 것은 슬펐다. 카사마츠가 깨어있을 때도 피곤에 절어있는 얼굴에 차마 키스도 길게 할 수 없었다. 건드리기만 하면 끙끙대면서 키세와 있을 때는 냄새가 난다며 파스를 붙이려하지 않는 것도 안쓰러웠다. 마주보고 웃은 것이 언제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실물이 있는데도 웃는 얼굴을 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키세의 가슴에을 싸하게 만들었다. 그토록 찬란하고 따뜻했던 추억에도 유리가 한 겹 덧 씌워진 기분이었다.

키세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문을 하나씩 닫았다. 오래 널어뒀던 이불에서는 보송보송한 햇빛냄새가 희미하게 나고 무거운 저녁 바람 냄새가 더 많이 났다. 이불을 침대 위에 펴 두고 나와 소파에 도로 앉았다. 키세는 전원이 꺼진 TV에 비친 자기 얼굴이 한 달 새에 무척 나이 들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구르는 카사마츠만은 못하겠지만.


"...나. 일어나 키세. 들어가서 자."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를 키세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크게 흔들려 퍼뜩 깬 키세는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나 왔어. TV보다 잠들었어?"

두리번거리는 키세의 고개를 잡아 자신을 보게 한 사람은 카사마츠였다. 거실엔 불이 환하게 켜져있었고 카사마츠의 눈 밑은 전보다 더 검었지만 키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서 카사마츠가 웃고 있었다. 가방과 정장 자켓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긴 했지만 카사마츠의 목에 제대로 걸려 있었다. 키세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물었다.

"어... 왔어요? 왜 바로 안 자고..."
"어, 정말로 일 다 끝났어. 내일부터 당분간 출근 안 해도 돼. 이번에 일 한 사람들 다 휴가래. 신입도 다. 그래서 내가 오늘이면 끝이라고 했잖아. 보름은 쉴 수 있어. 멋지지?"

카사마츠는 기운차게 팔을 들어올리려고 했지만 어깨가 말썽인지 팔이 말썽인지 실패했다. 통증을 피곤한 얼굴로 감내하면서 다시 웃어보였다. 키세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술을 꾹 물어 눈물을 삼켰다.

"미안해. 내일부터는 같이 여행도 가고 데이트도 하고 실컷 놀자. 휴가인데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
"응. 괜찮아요. 괜찮아. 고생했어요."
"응. 보고싶었어, 료타."

카사마츠는 조심스럽게 키세의 얼굴을 감싸며 다정하게 말했다.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작았지만 키세에겐 아주 잘 들렸다. 그 말에 키세의 눈물이 터졌다. 카사마츠는 당황할 기운도 없는지 셔츠 소매로 키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키세는 목이 메었지만 우는 채로 웃으면서 나도 보고싶었다고, 겨우겨우 말했다. 키세는 자각하지 못했던 외로움과 힘들었던 마음이 눈물을 막고 있다가 없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이렇게 나오는 건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 나도... 나도 유키가.. 유키오가 많이 보고 싶었어요..."
"응. 미안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카사마츠의 발음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눈도 이제는 반쯤 감긴 채로 깜빡인다기보다 눈을 길게 감고 있다가 뜨는 모양새였다. 키세는 거의 꾸벅 꾸벅 조는 카사마츠를 제게 기대게 했다. 소파에 앉은 키세에게 넘어지듯 안긴 카사마츠는 그대로 잠이들었다. 키세는 또 눈물이 났지만 이번에는 자기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카사마츠의 등과 다리까지 안아 든 키세의 얼굴에는 눈물이 조금 남아있었지만 분명히 안도와 기쁨의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카사마츠를 안아 옮기면서 키세는 연신 카사마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침대에 눕힌 채로 넥타이와 셔츠를 풀어내고 양말을 벗기고 구김이 간 정장 바지까지 조심스럽게 벗겼다. 따뜻한 물도 수건에 적셔와서 몸도 닦아주었다. 가슴을 닦아줄 때 카사마츠가 자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척 피곤하게 느껴지는 숨이었다. 서랍을 뒤져 입히고 나니 유치하다며 카사마츠가 입지 않으려 했던 강아지 무늬 잠옷이었다. 여러마리의 강아지가 카사마츠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은 키세의 카메라에 딱 한 장이지만 아주 잘 담겼다.

자고 일어나면 몸살로 앓을지도 모르고 혹은 오래오래 잠만 잘 지도 몰랐지만 지금 당장은 희미하게 웃으며 잠든 카사마츠의 이 표정이 무척 소중했다. 카메라에 담긴 카사마츠는 더 피곤해보이고 키세가 실제로 느꼈던 것보다 더 가벼워보였지만 분명히 키세 옆에 있었다. 키세의 기다림을 알아주었고 눈물도 닦아주었다. 무엇보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보고싶었다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거실 불도 끄고 문단속을 할 때 키세는 또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오니 인상을 쓰고 잠들어있는 카사마츠가 보였다. 슬쩍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불을 껐다. 카사마츠의 옆에 누워 이불을 덮자 별안간 카사마츠가 눈을 번쩍 떴다.

"유키오, 깼어요?"

놀란 키세는 반쯤 일어났지만 카사마츠는 그저 키세를 확인하고는 베시시 웃었다. 키세가 안도하며 다시 눕자 카사마츠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키세의 베개로 옮겨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카사마츠의 따뜻한 숨을 느끼며 키세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가볍게 미소를 띄우고 잠든 키세의 얼굴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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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잇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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